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수종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다. 그때 시골에는 텔레비젼은 물론 없었고 라디오도 아주 신식 집안이 아니면 없을 때였다. 낮에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산이나 바닷가로 다니며 놀았지만 밤이면 심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화책도 소설책도 소년잡지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피아노 학원이나 과외가 있는 때도 아니었다.

그때 가장 재미있는 일은 할머니에게 듣는 옛날 얘기였다. 동화도 있고 설화도 있고 그냥 귀신 나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만 레퍼토리가 동이 나고 말았다. 재미없어진 나는 밤이 되면 우리 집에 놀러오는 할머니 친구나 친척들에게 옛날얘기를 졸라대곤 했다.

그런데 가까운 친척 아저씨 한 분이 우리집에서 며칠 묵으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아저씨에게 옛날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이 아저씨는 "옛날 얘긴 할 줄 모른다"고 난색을 표하더니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미국에 나이가 서른인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가 얼마나 이 세상에 살 수 있나 하고 계산했단다. 이 사람은 잠자는 8시간을 빼고 나니까 하루가 16시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러면 예순 살까지 산다고 치면 자기 수명이 20년 밖에 안 남았다며 그 후부터 시간을 아껴 써서 성공했다고 한다. 너도 시간을 아껴야 한다." 이게 아저씨가 들려준 옛날 얘기의 전부였다.

이 재미없는 옛날 얘기(?)에 나는 김이 팍 새서 그게 무슨 옛날 얘기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들려줄 얘기가 없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 아저씨는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말주변도 없었으니 내 간청에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그 후에도 그 아저씨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옛날 이야기를 졸랐고 그때마다 아저씨는 그 "미국사람의 시간"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몇 번 이러다가 재미가 없어진 나는 더 이상 옛날 이야기를 조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때 할머니와 동네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들은 이야기는 기억에서 연기 같이 사라져버렸는데 아저씨의 '미국사람 시간 이야기'는 더욱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일이다. 왜 재미없던 아저씨의 시간 이야기가 세월이 갈수록 기억에 생생해지는 것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인생과 시간에 대한 깊은 맥락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DEW' 독자들은 20대(Twenty-something)의 초반에 속하는 영 레이디들일 것이다. 젊음이 영원히 자기를 떠나지 않을 것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을 나이다. 얼마나 좋은 때인가. 숨막히게 돌아가던 입시지옥도 사라지고 대학생이 되었다고 부모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내 경험으로도 20대가 인생에서 가장 긴 10년이었던것 같다.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울어보고, 웃어보고, 명상해보고, 회의해보고 할 수 있는 것이 20대의 특권이 아닌가 싶다. 물론 더 나이가 들어서 이런 일들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대의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은 확실히 '길이'가 다른 것 같다.

부모들이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가볍게 흘릴지 모르지만, 부모들의 마음엔 나이에 따라 시간의 길이가 같지 않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미국에서 그 곳 사람들이 "시간은 20대에는 20마일, 30대에는 30마일, 40대에는 40마일, 50대에는 50마일로 달린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정말 실감 나는 명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설명하면서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멋진 여자와 2시간 앉아 있어도 1분같이 짧게 느껴지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는 단 1분을 앉아 있어도 2시간 보다 길게 느껴진다." 시간의 상대성을 정말 실감 나게 설명하고 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나 대학 4년의 시간이 결국 고등학교 3년보다 더 빨리 지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생에서 시간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아니 인생자체가 시간이 아닌가. 저명한 경영학자이자 미래예측가인 피터 드러커 교수는 인생에서 시간은 아무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말했다.

DEW의 젊은 독자들도 한번 생각해보자. 20대의 1년이 30대의 1년과 다른 것처럼 나의 1년이 너의 1년과 다르다는 것을 계산해 보면 어떨까. 시간을 아낀 대학생의 30대와 시간을 낭비한 대학생의 30대는 시간의 길이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지 않을까.

살아 갈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엄청 많은 20대에게 부러움을 보내며,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보다 많은 입장에서 '나의 아저씨의 시간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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