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혜(이화여대, 영문2)씨는 이번 학기에도 강의평가 기간을 잊지 않기 위해 미리 수첩에 평가 날짜를 체크해뒀다. 신입생 시절 강의평가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남들보다 1주일이나 성적확인을 늦게 해야했기 때문이다. “제 때 성적확인 하려면 강의평가를 안 할 수가 없죠. 하지만 대부분 의례적인 질문이고 학기말에야 평가를 하는데 강의평가 결과가 수업에 반영되는지를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래서 효과에 대해서는 별 기대 안해요.”

대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직접 평가하는 ‘대학 강의평가제’는 93년 한신대를 시작으로 국내 대학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초기에는 강의평가가 대학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제도라는 찬성론과 교수권 침해이며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반대론이 팽팽하게 맞서기도 했다. 대학교육협의회 이혁열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강의평가제 도입 10년째를 맞은 현재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매학기 강의평가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실시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수그러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의평가가 교육환경 개선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생과 교수 모두 회의적이다.

형식적이고 모호한 평가 항목 몇 년 째 사용

대부분의 대학에서 기말 고사를 보기 전에 설문지나 OMR 카드, 인터넷을 이용해 강의평가를 실시한다. 설문은 10여 개의 질문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보통이다, 그렇다, 매우 그렇다’의 5가지로 대답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교수는 강의에 열의를 보였나’, ‘ ‘교수의 수업방법이 본 강좌에 적절했나’, ‘이 강의로부터 얻은 지식은 전공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것이었나’ 등 형식적이고 모호한 질문이 대부분이어서 강의평가 항목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대학들은 여전히 도입 초기에 개발한 평가문항을 3~4년이 지나도록 바꾸지 않고 있다. 김정아(중앙대, 통계4)씨는 “제가 입학한 이후 강의평가 항목이 한번도 바뀐 적이 없어요. 강의방식이나 대학 교육환경이 매년 빠르게 바뀌는데도 강의평가 항목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거죠”라고 말한다. 98년부터 교양과목에 한해 강의평가를 실시하고 있는 서울대도 지난 5년 동안 전혀 항목을 수정하지 않았다. 현재의 평가 항목으로는 객관적이고 믿을만한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강의평가 결과 공개

대부분의 학교에서 강의평가 결과는 학교측이 관리하며 교수들에게만 개별적으로 통보하고 교수평가 자료로 참고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강의평가 결과 공개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측의 강의평가 결과 미공개가 ‘학생들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며 학교측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지난 99년 연세대 총학생회가 우연히 입수한 강의평가 결과를 공개하려다 교수평의회와 마찰을 겪은 이후 연세대를 비롯해 많은 대학에서 총학생회 선거 때마다 강의평가 결과 공개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후보들이 많다.

경희대 총학생회는 직접 개발한 평가 항목으로 매학기 3~4천명이 참여하는 교양강의 평가를 13년째 이어오고 있다. 전공강의 평가는 교수들이 반대해 교양과목에 한해 비공식적으로 실시한다. 평가 결과는 ‘교양강의 평가집’이라는 책으로 묶여 수강신청 기간에 학생들에게 배포된다. “학교측은 ‘강의평가를 해야한다’는 대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다. 설문조사 결과 80~90%의 학생들이 평가 결과 공개를 원하는데도 학교는 미공개로 붙여두고 있으니 강의평가를 해도 학생들이 직접 느낄 수 있는 변화는 없습니다.” 총학생회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 정현익(법학4) 사무위원장의 말이다. 이들은 올 10월 초 총학생회가 연구, 개발한 강의평가 항목 개선안을 학교에 제시해 공식 강의평가 항목을 학생들이 직접 수정할 예정이다. 총학생회 주최 강의평가를 점차 전공과목으로 확대할 계획도 추진중이다.

서울대 재학생들이 운영하는 생활정보 사이트 Snulife.com(http://www.snulife.com)는 인터넷 강의평가 프로그램을 개발해 평가결과를 공개하기 위해 학교측과 협의 중이다. 박경렬(응용화학4) 전략기획팀장은 “학교측에서 강의평가 관련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내년 9월쯤에는 과학적인 강의평가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이 학생권을 적극적으로 누리게 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수들은 강의평가 결과를 공개하라는 학생들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강의평가 결과가 공개되면 강의평가가 마치 인기투표처럼 인식돼 대다수 교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교육의 질도 낮아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서울대, 인천교대, 한신대에 출강하는 이용우 강사(서양사학)는 “평가 결과가 학생들에게 공개된다면 유익함보다는 재미, 빡셈보다는 널럴함이 선호될 것이고, 엄정한 성적평가보다는 후한 학점 부여가 중시되는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강의환경부터 개선하라

강의평가의 효과나 결과 공개를 논의하는 것보다 열악한 강의환경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경호(서울대, 법학4)씨는 대형강의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강의평가는 유명무실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10명 규모의 수업이라면 모를까 수백 명이 좁은 강의실에 붙어 앉아 듣는 수업에서 강의평가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말한다. 교수들도 추상적이고 모호한 강의평가 잣대를 모든 강의에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전에 강의환경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화여대 이재경 교수(언론정보학)는 “강의실에 1백 명 이상 수강하는 강의실에서는 수업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겠습니까? 교육환경에 있어 강의평가를 실시할 기본적인 교육환경 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의평가는 어불성설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용우 강사는 강의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현재의 강의평가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학교에 멀티미디어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설을 잘 활용했냐고 묻는 질문도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대학들이 학생수가 많아 토론수업이 불가능한데도 ‘수업 중 토론이 활발했는갗, ‘교수가 개별 학생들의 이해도에 관심을 보였는갗라는 항목을 포함하고 있어 현실을 무시한 평가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강의평가를 담당하는 학교측은 강의환경을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뒷전인 채 "강의평가 도구를 개발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성균관대 교무처 최성찬(강의평가 담당)씨는  "강의평가 결과가 교수업적평가나 강사 재임용에 활용되기 때문에 강의평가의 효과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강의환경에 대한 불만은 평가받는 사람들의 의견일 뿐"이라며 강의환경 개선 요구를 일축했다. 서울대는 올해부터 강의평가 도구 개발을 담당한 교수학습개발센터가 신설됐지만 아직까지 업무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다. 서울대 학사과 권정일(강의평가 담당)씨는 "앞으로 강의평가 항목들을 좀더 과학적으로 개발할 것입니다. 평가도구가 개선되면 강의평가의 효과도 더 높아지겠죠"라고 말한다. 그는 "강의환경은 점진적으로 발전되기 때문에 교수나 학생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할 뿐"이라며 열악한 강의환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한다.

학생권과 교수권의 접점, 강의평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간 1:1 수업을 강조하는 만큼 학생들은 시기에 상관없이 강의평가서를 제출하고 교수들도 이를 수업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은 매학기 두 번씩 실시되는 강의평가 결과를 담은 엘로우북을 만들어 학생들이 수강신청에 참고하게 한다. 미국의 노스다코다주립대의 강의평가서는 24개의 객관식 문항이 8장에 걸쳐 나와있고, 휘턴대는 5개의 주관식 문항에서 수업과정, 수업방식, 과제나 시험의 수준 등에 대해 상세하게 평가하도록 하고 있다.

선진 대학에서 강의평가는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학습의 질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절차로 자리 잡았다. 최적의 강의환경이 갖춰진 상태에서 제 권리를 지키려는 학생들의 의식과 학생들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는 교수들의 유연한 사고가 만들어낸 결과다. 국내에도 인하대에서 토론중심 수업, 실습 수업 등 수업 특징과 수강인원에 따라 10가지의 강의평가가 시행되고 있고, 고려대도 강의 유형에 따라 강의평가 종류가 6가지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일부 대학들의 이야기이다. 이제는 생색내기용이 아니라 좀더 현실적이고 믿을만한 강의평가가 필요하다. 학교는 콩나물 시루 같은 강의실 환경부터 개선하라는 현장의 소리에 언제까지 귀를 닫고만 있을 것인가.

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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