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력 56년(서기 2000년) 7월, 청아대(靑阿臺) 소속 비서관 소시민(小市民)씨는 귀가를 서둘렀다. 나라 안팎으로 사건이 연이어 터져, 휴가도 반납하고 근무를 하는 소시민씨였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얼음과자를 사가면 딸아이를 달랠 수 있을까?'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딸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시민씨의 발걸음은 얼음과자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소시민씨가 사는 곳은 조선(朝善). 아침의 고요한 나라라고 일컬어지며, 마음이 착한 사람들이 사는 조그마한 나라였다. 하지만 전략상의 요충지라는 위치 때문에 예전부터 세력 대결의 장이었고, 지금은 그 완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전쟁 때문에 떨어져 살고 있는 북환(北煥)과 대치 중이었고, 바다 건너는 니혼(泥渾)과 아매리가(兒魅利假)라는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다.

 소시민씨가 휴가까지 반납하고 매달리게 만든 사건은 제 3대 선왕 박통(朴通)의 기념관 건립 문제였다. 선왕 박통은 역사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박통은 북환과의 전쟁 이후, 피폐해진 국토 위에서 놀라운 속도의 경제 개발로 조국 근대화를 이뤘다고 하기도 한다. 특히 신리(新里)운동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수하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을 뿐 아니라, 장기 집권하면서 인권을 유린했었기 때문에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선왕 박통은 이름처럼 조선의 여러 곳을 시원하게 뚫는 고속도로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름대로 가슴에 수하의 총알을 관통 당해 세상을 등진 인물이었다.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조선의 7대 왕 대제이(大濟理)가 박통의 기념관을 수도 한양에다가 짓기로 한 것이다.

"뭐라고? 대제이가 기념관 건립을 윤허했다고? 그것이 진정 사실이란 말이냐? 이런 정신나간 사람 같으니……."

"저하, 고정하시오소서. 혹시나 화가 미칠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자신의 치적을 하나라도 늘리기 위해 선진국들의 모임인 오이시지(傲夷市地)에 서둘러 가입했다가, 아임애포(餓賃哀包)라는 엄청난 국난을 불러온 6대 왕 와이애수(臥而哀首)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와이애수의 측근인 박죵웅 의원은 그 말이 혹시라도 새어나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역대 왕들 모두를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면 몰라도, 어찌 박통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기념관을 만든단 말이냐? 이것은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있는 나를 너무도 능멸하는 처사가 아니더냐."

"소신, 저하의 뜻을 백분 이해하였사옵니다. 며칠 후 대제이를 향한 공개 상소를 할 것이니 너무 염려마오소서."

"내 심중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구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뒤가 섭섭지 않을 것이야."

"소신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며칠 후,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왕이 직접 윤허한 기념관 건립건에 대해 야반(野班)의 박죵웅 의원이 공개 상소를 올린 것이다. 박의원은 박통의 기념관 건립이 차기 왕위를 위한 정략적 인상이 짙다며 건립 계획 취소를 요구했다. 이를 필두로 국민들의 상소가 여기 저기서 빗발쳤고, 각 관청의 험패이지(驗悖而紙)에는 찬반 양론이 쏟아졌다.

 박통의 딸이자 현재 야반의 부교주인 근혜군주는 격분했다.

"와이애수가 감히 반대를 했다구요? 몇 년 전, 재임중이었을 때 그도 아버지의 기념관을 짓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요? 조용히 절에 가서 아임애포에 대한 속죄나 할 것이지……. 정말 우습지도 않군요."

"하지만 부교주님. 국민들의 상소에는 귀를 기울여 봐야 할 것이옵니다. 국고에서 무려 2백억원을 지원하는데다, 민간 성금 5백억원 등 총 7백억원의 기금을 조성해야 하옵니다. 몇 년 전 북환을 대비한다며 평화의 댐 건설 명목으로 6백억원이 넘게 모았던 적이 있지 않사옵니까? 국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옵니다.

인권을 탄압했던 독재자에게 7백억원을 들여 기념관을 건립할 돈이 있으면 결식 아동들에게 급식이나 하라는 쓴 소리를 들으셔야 하옵니다. 2년 후 국제적인 축구 경기가 있을 상암골에 5천평이나 부지를 조성하여 건립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

"조용히 하시오! 아버지의 기념관은 시골 촌구석인 아버지 생가 자리도 아니고, 한양에다가 지어야 하오. 국제적인 위상도 있고 하니 말이오. 더 이상의 말은 듣기 싫소. 물러가시오."

갑작스런 부교주의 호출에 급하게 달려왔던 야반 수석 자문관은 뭔가 석연치 않은 씁쓸함을 간직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허허…….진정한 동서화합의 길은 아직도 멀었더란 말이냐. 세력 견제를 위해 짐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자를 용서할 자격도 없단 말이냐."

청아대에 입궐한 후로 거의 손대지 않았던 술을 오랜만에 마시는 대제이였다. 옆에서 조용히 술잔을 쳐주던 왕비는 눈을 들어 근래 부쩍 야위어진 용안을 바라보았다.

"마마. 용서와 화해는 미덕이옵니다. 하지만 정의의 실현도 중요하옵니다. 지금의 위치는 모든 국민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유념하소서. 국부의 자리는 모든 이들의 의견을 조화롭게 수용하고 그것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자리이옵니다."

"짐의 판단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것이오?"

"국민들의 세금은 혈세이옵니다. 그야말로 피같은 세금이옵니다. 혈세를 200억이나 들여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영남권을 의식한 정략적 술수라는 말들이 떠돌고 있사옵니다.  재(財)테크가 아니라 차기 왕위 계승전을 위한 권(權)테크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 무리는 아닌 줄로 아옵니다. 신중을 기해서 판단하소서."

"권력이라는 것이 말이오…….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탄 것과 같다오. 쓰러지지 않으려면 계속 달려야 하는 자전거 말이외다. 내리막길이라 더욱 가속도가 붙는데,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기는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오."

 그렇게 조선의 밤은 죽은 자의 영혼과 산 자의 고뇌가 얽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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