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서양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로 평가된다. 대표작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구약성경의 ‘유디트’를 그렸다.

유디트는 동족인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벴다. 젠틸레스키는 유디트를 전장에 나온 전사처럼 적의 머리를 꽉 움켜쥐고 강하게 누르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풍성한 웨이브 머리에 날카로운 선글라스, 짙은 빨간 입술의 여성이 홀로페르네스로 보이는 남성의 목을 벤다. 윤나라 씨(29)가 젠틸레스키 작품을 오마주한 그림이다. 인상을 쓴 얼굴과 한쪽 손으로 남성의 얼굴을 쥐어 잡고 역동적으로 목을 베는 캐릭터가 유디트와 닮았다.

▲ 젠틸레스키 작품을 오마주한 윤나라 씨의 그림(윤나라 씨 제공)
▲ 젠틸레스키 작품을 오마주한 윤나라 씨의 그림(윤나라 씨 제공)

윤 씨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을 소재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 그래픽 아티스트다. 빨간색을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캐릭터 이름은 ‘Ms NOBODY(미즈 노바디)’. 결혼과 관계없이 여성을 부르는 ‘Ms’와 특정 인물이 아닌 모든 여성을 아우른다는 뜻의 ‘NOBODY’를 합쳤다.

그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600명이 넘으면서 SNS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작품 게시물 댓글에는 ‘멋지다’, ‘작품 설명을 보니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는 반응부터 ‘계속 목소리를 내는 작업을 멈추지 말아요’라는 응원도 있다.

윤 씨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심예나 씨(29)는 “내용을 재미있밌는 형태로 풀어내는 부분이 좋았다”고 했다. 심 씨는 여성의 신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그래픽 아티스트다.

여성의 솔직한 욕망과 주체성, 강인함부터 여성 혐오에 대한 비판까지 작품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윤 씨가 궁금해졌다. 6월 9일 윤 씨가 자주 작업하는 서울 성북구의 카페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물었다.

젠틸레스키를 오마주한 그림은 윤 씨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많은 남성 화가가 유디트를 성적 욕망의 대상이나 소녀로 그렸지만 젠틸레스키는 근육질의 전쟁 영웅으로 묘사해 강력한 여성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윤 씨는 “다른 화가가 그린 유디트 그림에는 사회적으로 여성의 성과를 낮게 묘사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오마주한 그림이 폭력적이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전쟁 영웅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젠틸레스키가 유디트의 강인함을 잘 표현한 데에는 그녀가 겪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젠틸레스키는 열일곱 살 때 아버지 동료이자 스승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가해자 잘못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순결을 증명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느꼈던 오명과 고통을 홀로페르네스에게 투영해 영웅 유디트의 결연함을 더 잘 묘사했을 것이라고 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가해지는 양상이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그렇기때문에 여전히 유효한 주제라 생각해 이 작품을 오마주했어요.”

윤 씨는 관객에게 페미니즘의 정의나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져 페미니즘 담론을 함께 발전시키고자 한다. 담론이 정답보다는 또 다른 질문으로 끝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또래인 2030 여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을 다룰 때 그렇다.

‘해체되어 소비되는 여성의 몸’이란 작품을 통해선 꾸밈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캐릭터가 정자세로 서 있는데 몸이 마네킹처럼 관절마다 분리된 모습. 여성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시각을 지적했다. 윤 씨는 “여성의 몸을 기계의 부품처럼 필요한 부분만 조각조각 나눠 이를 소비하는 사회와 미디어의 시각을 비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

▲ 윤나라 씨의 그림 ‘해체되어 소비되는 여성의 몸’(윤나라 씨 제공)
▲ 윤나라 씨의 그림 ‘해체되어 소비되는 여성의 몸’(윤나라 씨 제공)

한편으론 캐릭터의 모습이나 자세를 보고 오히려 코르셋을 강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작품 설명에도 윤 씨는 ‘캐릭터가 입고 있는 옷이나 포즈 등이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여성의 주체성과는) 반대의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이리저리 방법을 강구해본다’고 썼다.

하지만 윤 씨는 캐릭터의 외양이 사회가 정한 여성스러움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했다. 캐릭터에는 윤 씨의 모습이 반영됐지만, 그가 성인이 됐을 때는 마른 몸과 투명한 화장 그리고 귀여운 스타일이 유행이었다. 캐릭터처럼 강렬한 인상과 딱 붙는 옷은 반항의 의미였다.

“‘남자들은 그런 옷 스타일이나, 화장 진하게 하는 거 안 좋아해’라는 이야기를 밥 먹듯이 들었어요. 실제로 학교 남자 선배들이 저를 상대하기 어려워했죠.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획일화된 여성 스타일에서 벗어나 저만의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모습이 정말 원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태도라고 덧붙였다. 이런 질문을 통해 규정된 여성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을 찾았다.

▲ 윤나라 씨가 카페에서 작업하는 모습
▲ 윤나라 씨가 카페에서 작업하는 모습

질문은 윤 씨가 작품을 구상하는 주된 방법이다. 그는 가톨릭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수업은 책을 읽고 생각하거나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논리를 세우고 당위성을 탐구하는 방법을 익혔다. 지금도 페미니즘이나 철학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최근에 읽은 책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동료인 포토그래퍼 김한솔 씨(30)는 윤 씨와 사회 이슈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공부가 필요하면 책을 같이 읽는다. 김 씨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고 필사와 토론을 했었다”며 윤 씨의 작품은 끊임없는 공부의 결과라고 말했다.

윤 씨는 자신의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자 작년 9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이제는 전업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그는 7월 18일부터 24일까지 개인 전시회를 처음 열었다. 앞서 4월 30일부터 5월 8일까지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아트스페이스 블루스크린에서 진행된 전시회 ‘INFECTION’에 참여했다. 윤 씨가 처음 대중에게 선보인 전시회로 작가 6명과 함께 했다.

“예술가들은 적극적으로 시대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윤 씨는 예술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표현했다. 작품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목표도 다양한 사람들의 고민을 비출 수 있는 ‘멋진 언니’가 되는 거다.

“여성 후배한테 멋진 언니로서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들이 갖는 비슷한 고민이 있잖아요. 나아가 여성을 비롯해 소외받는 사람의 목소리를 확성기처럼 더 크게 들리게 할 수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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