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예무스> 정기연주회에서 테너 위정민 세종대 교수가 신파조로 “아 ~ 것은 ~ 것이었던 것이다”라며 한국 근대사의 애환과 함께 주옥같은 가곡을 소개했다. 서울예고 출신의 중진 성악가들이 ‘목련화’부터 시작해 ‘비목’ ‘얼굴’ ‘가고파’를 거쳐 ‘그리운 금강산’까지 불러 젖혔다. 

이 가곡을 들으면서 이번에 방문했던 칠레의 대통령 집무실인 모네다궁이 떠올랐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칠레의 근대화와 민주화가 우리와 너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모네다궁은 산타 루시아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산티아고 다운타운에 있다. 네모반듯한 평지에 일자로 세워졌다. 궁 주위는 낮은 차단물로 둘러싸여 있다. 경찰 제복을 입은 경호팀이 이 칸막이 밖에서 순찰을 돈다. 대통령궁의 오른쪽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흉상을 발견했다. 

▲ 모네다 대통령궁
▲ 모네다 대통령궁

아옌데 인민연합 후보가 1970년 11월 3일에 모네다궁의 주인이 됐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세계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칠레의 좌경화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남미 정책이란 큰 벽에 부딪친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1년 핑퐁외교로 중국의 문을 열었다. 한창 인기가 높아 1972년 선거에서 재선 당선이 확실시됐다. 미국은 남미에서 더이상 쿠바와 같은 공산화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칠레 군부는 전통적으로 펜타곤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 칠레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활동이 ‘트랙 2’로 불리며 사회 혼란과 쿠데타를 조장했다고 한다 (참조=살바도르 아옌데·파블로 네루다 외, 정인환 옮김,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11>, 2011).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본격적으로 파헤쳐질 때였다. 미 언론의 탐사보도에 시달렸던 백악관이 칠레의 쿠데타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관여했을까 의문이다. 

의사 출신의 아옌데는 정치인 김대중처럼 인고의 세월을 거쳤다. 네 번째 출마에서 투표율 1.3% 차이의 박빙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집권 후 사회개혁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칠레의 진보적 발전에 기여할 방식으로 최후를 맞았다는 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비슷하다. 

▲결사 항전하는 아옌데 대통령(출처=BBC) 
▲결사 항전하는 아옌데 대통령(출처=BBC) 

아옌데는 집권 중에 대내외 압박을 받았다. 개혁의 실패로 경제가 난관에 봉착했다. 물가는 살인적으로 급등했다. 대기업의 보복적 공장 폐쇄로 실업률도 두 자릿수로 늘었다. 

오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에두아르도 프레이 전 대통령의 기독민주당과의 공생 관계마저 깨졌다. 집권 초기 60%에 가까웠던 대통령의 지지도가 집권 2년 차에는 30%대로 곤두박질쳤다. 

칠레의 육해공군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73년 9월 11일 화요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쿠데타에 나섰다. 경찰 수뇌부까지 동조했다. 해군이 먼저 움직였다. 공군 비행기 2대가 이날 대통령 집무실 상공으로 날아가 모네다궁에 로켓탄을 18번이나 투하했다. 콘크리트 지붕이 날아갔고 가운데가 푹 파였다. 

아옌데는 피노체트의 망명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 채 대통령 경호팀과 결사 항전했다. 모네다궁에 공군기의 폭격이 가해지자 가족과 참모진을 내보냈다. 그리고 카스트로가 준 기관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노체트는 아옌데에 충성서약을 하고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앞서 5월에 일어났던 쿠데타를 직접 진압했었다. 해군이 먼저 움직였던 9월 11일 쿠데타에는 바로 직전에 지휘부에 합류했다. 쿠데타 성공 이후에는 대통령으로 추대돼 1990년까지 17년간 군부 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 공군기의 폭격으로 모네다궁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출처=BBC) 
▲ 공군기의 폭격으로 모네다궁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출처=BBC) 

아이러니하게도 칠레는 이 기간에 경제  틀을 다져서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우뚝 선다. 소위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로 불리는 미국파가 네오리버럴리즘(Neo Liberalism)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쳤다. 한국의 제5공화국 초기에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시카고 보이스로 불리는 칠레의 경제 각료는 작은 정부를 지향해 각종 규제를 완화해 나갔다. 아옌데가 국유화했던 구리 광산을 제외하고는 공기업을 사기업화했다. 또 자유주의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늘려나갔다. 

노벨 경제학상을 1976년에 받은 밀턴 프리드먼 시카고대 교수는 “남미의 기적이 칠레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칠레의 신자유주의 경제 실험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영국병과 싸웠던 마거릿 대처 수상의 경제정책으로 이어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의 미국 경제는 낮은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하는 중앙은행의 성공적인 금융정책으로 불황이 없이 20년에 가까운 경제 호황을 누렸다.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금융 산업을 필두로 대규모 규제 완화를 통해 미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카터 행정부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잡고자 중앙은행은 레이건 대통령 초기에 불황마저 감수하며 두 자릿수의 이자율까지 감수했다. 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에 근거한다. 

프리드먼은 최대 생산량에 비유되는 탁자 양 끝에 묶인 “고무줄 잡아당기기(plucking) 모델”로 경제 효율성 원리를 제시한 바 있다 (참조=김창진, 한국경제와 미국경제, 심재철(편) <경제보도의 이상과 현실>, 15-47쪽, 1999; Milton Fridman, The Optimum Quantity of Money and Other Essays, 1969). 

▲ 시카고 보이스의 근거지인 칠레가톨릭대
▲ 시카고 보이스의 근거지인 칠레가톨릭대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35번이나 인용했다. 젊었을 때 즐겨 읽었던 “인생 책”이 프리드먼 교수의 <선택할 자유>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윤 대통령은 앞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쳐나갈 것으로 추측해본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겸 증권선물위원장이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대와 고려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내다 차관급으로 발탁됐다. 

피노체트 군사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한쪽은 경제 총량이 늘어났다고 자랑하지만 다른 쪽은 경제 불평등이 심화됐다고 문제 삼는다. 

칠레는 1975년 이후 두 자리 경제성장률을 이뤘고, 국민총생산량이 1974년 이후 무려 10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칠레의 국내총생산(GDP)은 1977년에 140억 달러였다. 2017년에는 이보다 20배에 가까운 2470억 달러로 늘어났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다. 국민 1%의 상층부가 칠레 국민 총 소득의 28%를 소유한다. (참조=Paul Sigmund, The Rise and Fall of the Chicago Boys in Chile, 2006). 

사회적 보호막도 약하고 상대적 빈곤감이 늘어났다. 산티아고에서 2019년 지하철 요금이 오르자 대규모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난 연말에 젊고 진보적인 36세의 가브리엘 보리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시카고 보이스의 경제정책은 경제학자 사이에서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칠레 국민에게 일치된 의견이 있다. 더이상 군부가 집권하는 정치 체제를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칠레의 경제발전과 소득격차 해소, 그리고 정치적 민주화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우리가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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