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이다. 해파리다... 특별히 길고 미끈거리는 느낌의 몇 가닥의 더듬이가 마치 손짓해 부르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본문 중 >

소설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의 주인공 세이지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바다 속에서 해파리의 구조를 받는다. 그가 사랑하는 소녀 쓰루의 얼굴을 한 해파리는 그를 향해 손짓하며 웃는다. 책을 읽는 내내 바다 밑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다. 심해, 몽환의 세계. 그 속에서는 끝없이 쏟아지는 소다수 같은 청량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일본 북부 어느 바닷가 마을 소년 세이지는 17살의 야간 고등학교 학생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해 출세할 것으로 주위의 기대를 모으던 형이 은행강도 짓을 하다 경찰에 붙잡힌 후로 세이지의 가족들은 예전의 단란했던 모습을 잃었다. 부지런하던 어머니는 모든 삶의 의욕을 져버린 채 텔레비전 보기와 먹는 일에만 열중한다. 말단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직장을 관두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집을 나갔다.

이쯤에서 세이지도 다른 가족들처럼 인생의 낙오자, 못된 불량 학생이라는 설명이 나올 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이지에게 산산 조각난 가정을 비관하며 가출하는 일 따윈 없다. 오히려 가족들이 모두 떠난 집을 혼자 차지할 수 있게 어머니의 죽음을 바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가담했던 강도단의 두목인 고바야시가 돈을 들고 그를 찾아온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쓰루라는 소녀를 잠시 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삶을 포기할 의욕조차 없던 세이지는 쓰루를 좋아하게 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어머니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 이제 세이지에게 희망이 있다면 어머니, 아버지, 형이 없는 집에서 쓰루와 단 둘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쓰루와의 행복한 시간도 잠시, 어머니는 비만으로 죽고 친구 기요시도 자살했지만 사랑하던 쓰루도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이 소설의 작가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아름다운 산문체로 현대 일본소설의 한 맥을 담당하고 있는 마루야마 겐지이다. 영상보다 더 시각적인 소설을 쓰기 위해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표현과 묘사의 시도라는 그의 문체는 짧고 간결하지만 힘이 깃들어 있다. 소설 안에는 은둔 작가로 알려진 겐지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성립되는 과정과 그 배경이 되는 성장기가 녹아 있다. 멜빌의 <백경>에 감명받아 해양 통신사가 되려고 했었다는 겐지의 소년시절은 주인공 세이지와 많이 닮았다. 17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세상과 자신에 체념한 세이지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꿰뚫듯이 묘사하는 작가의 독백은 세이지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이 책에서는 세이지를 둘러싼 우울한 가정환경, 무능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등이  다양한 표현으로 반복된다. 주변의 일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관심하지만 속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곰곰히 되씹는 세이지의 웅크린 자아를 보여주는 듯 하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듯 활개치는 그의 두 날개도 실은 상처투성이다. 어떻게 보면 문단 전체에서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문구들은 시적인 운율을 갖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주인공의 우울한 외부 세계를 일부러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이다. 동시에 정반대로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하는 세이지의 심리를 포착하고 있다.

소설에서 세이지와 바다는 시종일관 하나다. 태생 적으로도 세이지는 바다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할아버지를 닮은 타고난 어부다. 게다가 야간 고등학교 같은 반 학생들과 의기투합하여 한 척의 어선을 구입하면서 세이지는 바다와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던 중 급우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스즈키가 상하관계도 없고 어떤 차별도 없는 배를 띄워보자는 제안을 한다. 꿈을 나누기 위한 배, 세이지는 쓰루와 함께 살며 가끔씩 배를 띄우는 꿈을 꾸곤 한다. 

푸른 바다 저멀리 새희망이 넘실거린다.
하늘높이 하늘높이 뭉게꿈이 피어난다.
여기다시 태어난 지구가 눈을 뜬다 새벽을 연다.
헤험쳐라 거센 파도 헤치고 달려라 땅을 힘껏 박차고
아름다운 대지는 우리의 고향. 달려라 코난 미래소년 코난
우리들의 코난                          
                                    <미래소년 코난> 한국어판 주제가 가사

바다 너머의 이상국. 현실을 떠나 바다의 세계로 향하는 모험. 의기충만한 세이지의 모습은 오래 전 TV에 방영됐던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의 주인공 코난과 유사한 점이 많다. 문명이 모두 파괴된 지구, 할아버지와 단둘이 '홀로 남은 섬'에 살던 주인공 코난이 '인더스트리아'의 무장병들에게 납치된 라나를 구출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고향 '하이하버'를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코난이 꿈꾸는 바다 건너의 '하이하버'는 현실의 고민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는 이상향이다. 소설 속 쓰루처럼 여리고 순수한 라나의 고향이자 지구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마지막 땅이다. 소설의 세이지는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하지만 동남아 소녀 쓰루에게 만은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 언제나 해맑게 웃는 라나를 구출하려 온갖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코난처럼 세이지도 쓰루를 위해서라면 무서운 악당 고바야시에게 맞서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각각의 결말에서 나타난다. 코난은 수많은 역경에도 라나와 함께 '하이하버'에 닿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이지는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갈 것을 꿈꾸면서도 실제로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에서 모든 것이 주동자 스즈키가 학생들의 돈을 훔치기 위해 꾸민 사기극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세이지는 실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또다시 모든 일에 체념한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어. 어차피 인간이란 놈들은..." 화를 내며 펄펄 뛰여야 할 일 앞에서의 담담함...하지만 세이지에게 체념과 담담함은 슬픔과 분노를 이기는 무기이다. 겉으로 꿈도 없고 감정도 메말라 보이는 사람의 속마음은 굳게 닫혀있는 것처럼.  

'제대로 된 어부는 언젠가는 바다 밑에 가라앉는 법이다.'        <본문 중>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 꿈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세이지에게 큰 실망은 없다. 세이지의 생활이 더 황폐해진 것은 아니다. 이제 세이지의 이상국은 더 이상 바다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이지의 할아버지가 말했던 진짜 어부들은 바다 속에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든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세이지가 동경하는 세계가 있다. 현실에서는 쉽게 체념하고 포기했던 세이지의 꿈들이 바다 속 그곳에서 세이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 바다 깊은 곳에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건설 중이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우리의 꿈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오늘밤 깊이 잠든 후 세이지처럼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닮은 해파리의 등에 실려  그곳에 닿을 것이다.

안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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