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일 씨(58)는 후보 25명의 얼굴을 지나는데 30보를 걸었다. 9m 50cm. 서울 성북구 길음1동에 걸린 지방선거 벽보의 길이다. 벽보별 규격은 가로 38㎝, 세로 53㎝. 후보는 시장 5명, 구청장 2명, 시의원 2명, 구의원 9명, 교육감 7명이다. 

선거를 이틀 앞둔 5월 30일 오후 6시경. 지하철 4호선 길음역 7번 출구 앞은 선거사무원으로 붐볐다. 퇴근길 유권자에게 저마다 인사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구의원 후보 노형승입니다.” 

김 씨도 선거사무원 사이에서 멈췄다. “아유. 2-가, 나, 다? 많기도 많네.” 그는 성북구 토박이다. 58년 살았다. 그에게 이번 선거는 ‘답이 적힌 시험지’다. “그냥 지지 정당을 뽑으면 되는 거지. 후보 면면은 안 봐요.” 김 씨는 38년째 민주당을 지지한다. 

길음1동은 성북구의원선거에서 성북구나선거구에 속한다. 후보 9명 중 5명이 뽑힌다.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도입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선거구 30곳이 같은 방식으로 의원을 뽑는다. 

그중 기초의원 5명을 뽑는 선거구는 전국 5곳이다. 서울에서는 성북구가선거구(성북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2동 안암동 보문동) 성북구나선거구(정릉동 길음1동) 동대문구바선거구(장안동 답십리2동)다. 

▲ 길음역 7번 출구 앞 유세현장 
▲ 길음역 7번 출구 앞 유세현장 

“길음동 토박이 김성용입니다. 구의원은 5번 김성용입니다.” 홍순애 씨(63)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성북구의원 무소속 김성용 후보의 선거사무원. 이날로 12일째 선거운동 중이다. “이번엔 다섯 명까지 뽑혀요. 진짜 토박이 김성용 후보가 뽑혀야 성북구가 잘 살아요.” 

지나던 주민 전순길 씨(71)가 다가왔다. “왜 헷갈리게 5등까지 된다고 하는 거야? 한 명밖에 못 찍는 거라는데?” 전 씨 말대로 기초의원선거 투표지에 2명 이상을 기표하면 무효 처리된다. 1명만 기표하면 득표순위대로 5명이 선출된다. 

“양당에서만 다섯 명이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은 있죠. 무소속이나 군소정당은 내일까지 혈투일 거예요, 아마.” 홍 씨와 함께 선거운동을 하던 최영미 씨(46)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실랑이가 생겼다. “아까부터 왜 자꾸 길을 막아요? 선거운동이 대수에요?” 길음역 7번 출구 앞 골목으로 운전하던 30대 남성이 차에서 내렸다. 최 씨가 선거사무원에게 뒤로 빠지라고 손짓했다. “후보가 많아져서 공간이 정말 비좁아요.” 

같은 날 오후 7시, 성북구 보문동 동일주유소 공사 현장. 주민 임관섭 씨(42)가 선거벽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지나가는 시민이 볼지 모르겠네요.” 공사현장 가림판에 붙은 선거벽보에는 구의원 후보 8명을 포함해 후보 24명의 얼굴이 보였다. 

▲ 보문동 공사현장의 선거벽보 
▲ 보문동 공사현장의 선거벽보 

임 씨는 정당투표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선거벽보만 보고선 공약을 알 수 없고, 우편 공보물을 보기엔 노력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공직선거법 64조는 선거벽보에 후보자의 사진, 이름, 기호, 정당명 외에도 정책을 기재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선택사항이어서 후보자는 대부분 정책을 넣지 않는다. 성북구가선거구 선거벽보엔 교육감 후보 7명을 제외하고 공약이 없었다. ‘검증된 구의원’, ‘일 잘하는 새 인물’ 같은 문구만 보였다. 

안암동에서 자취하는 김지현 씨(20)는 공약을 모르고 사전투표를 했다. 대선에 이은 두 번째 투표였다. 후보가 많아 공보물을 읽기에 부담이 컸다. “어차피 공약 다들 안 보잖아요.” 

투표장에서는 1명만 기표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고 당황했다. “5명 찍을 생각하고 갔죠.” 고민 끝에 1명을 골랐다. “고민하기 싫어서 그냥 여러 칸에 기표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아요. 무효표가 많이 나오겠죠.” 

▲ 장안동사거리의 현수막 
▲ 장안동사거리의 현수막 

밤 9시,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사거리. 유지연 씨(39)가 혼자 서 있었다. 동대문구의원 손경선 후보의 선거사무원이다. 

“구의원은 8명의 후보가 있고요. 그중에서 5명이 뽑혀요. 한 분만 뽑아주시는 거예요.” 선거 규칙을 행인에게 일일이 설명하며 인사했다. “현역 구의원이십니다. 꼭 좀 뽑아주세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송지영 씨(24)가 유 씨에게서 명함을 건네받았다. 아직 투표할 후보를 정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중대선거구제는 양당 중심의 정치를 바꿀 신호탄이다. “이왕이면 기회를 여럿에게 줘야죠. 그게 민주주의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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