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서울 중구의 덕수궁 뒤편에 있는 국립정동극장을 찾았다.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이하 쇼맨)’가 공연 중이었다. 시작과 함께 무대 양쪽 모니터에 자막이 등장했다. ‘쇼맨’은 한국 창작 뮤지컬이다. 그런데 배우가 하는 한국어 대사와 노래 가사가 자막으로 제공됐다. 가사는 음표와 기울임체로 구분했고, 누구의 대사인지도 적혀 있었다. 배우가 무대 뒤에서 내는 소리나 내레이션, 효과음도 자막으로 나왔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관객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장애인이나 고령자를 배려하는 조치가 공연장의 배리어프리(barrier-free) 서비스다.

자막이나 수어 통역, 음성 해설 등을 통해 공연 관람을 막는 장벽(barrier)을 허물자는 움직임을 ‘배리어프리’ 운동이라고 부른다. 한국 공연계에서도 2019년 무렵부터 배리어프리 논의가 본격화됐다. 주로 국공립 단체와 공연장이 이 움직임에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관객도 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공연장에서의 확산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한국의 등록장애인은 2021년 기준 약 264만명이다. ‘2020 통계로 보는 장애인의 삶’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에서 주말에 문화예술을 관람하는 장애인은 6.9%로 조사됐다. 비장애인(20.1%)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이 기사에서는 한국 공연장의 배리어프리 상황을 점검하고 개선해야 할 문제들을 짚어봤다.

정동극장은 4월 1일 막을 올린 뮤지컬 ‘쇼맨’의 일부 공연에서 한글 자막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약 한 달 반의 공연 기간 중 8번 제공한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김하윤 씨(22)는 외국어 공연을 제외하고는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 경우를 처음 봤다고 했다. 관람하는 동안 모니터가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공연 중간에 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자막을 보고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배우가 자막과 다르게 말할 때 원래 대사가 아닌 애드리브임을 알 수 있는 점도 만족했다. 그는 “청각장애인분들은 못 들으시니까 그런 것(자막 제공)도 괜찮으시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관객 김수민 양(18)은 약간의 난청이 있어 일부러 자막이 있는 날로 예매했다. 공연장처럼 음향이 울리는 공간에서는 대사나 가사를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고 했다. 그는 “장애가 있거나 외국인분들이 아니어도 저처럼 진단받긴 애매한데 좀 안 들리는 분들도 있다”며 “오늘 같은 경우도 뭔지 모르고 지나쳤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 큰일 날 뻔했다 싶은 대사들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다른 공연에서는 자주 중요한 대사를 놓쳤다고 했다. 다만 한글 자막을 원치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예매처 공지를 더 눈에 띄게 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맨 앞에 앉았던 유설린 씨(34)에게는 고개를 옆으로 돌릴 때만 모니터가 보였다. 화면이 보일 때도 크게 방해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 좋겠다”면서 필요한 관객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앞에 앉아 모니터를 보기 어려운 경우, 배경색이나 글자 색, 크기, 폰트 등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배리어프리가 필요한 사람들의 의견을 더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를 공연 중인 국립정동극장 
▲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를 공연 중인 국립정동극장 

이날 극장에서 만난 관객들은 배리어프리 도입에 긍정적이었다. 공연장 배리어프리에 대한 관심은 올해 초 공연된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의 사례에서도 드러났다. 연극은 진정한 소통이 부재한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극 중 아들 ‘빌리’는 청각장애인이다. 농인(수어를 제1언어로 하는 청각장애인)이 등장하고 소통을 말하는 작품에서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막 서비스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28개. 단독 예매처 인터파크 티켓에 달린 후기 중 자막(배리어프리)을 언급 또는 요구하는 글의 수다. 총 1266개의 후기 중 10%가 넘었다. 아이디 smilemin***은 “농인에 대한 극을 만들면서 농인이 관람하지 못하는 극이라는 사실이 너무 아쉽다”고 했다. 아이디 skm***은 “공연 중에 수화를 사용하고, 장애를 소재로 하는 공연인데 배리어프리 대책 없이 공연을 한다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다”고 썼다. 일부 관객은 공동제작사 노네임씨어터컴퍼니와 정동극장 등에 직접 연락도 했다. 공연 막바지 2주간은 태블릿을 통해 자막을 제공했다.

정동극장 공연기획팀 이수현 팀장(46)은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적용하려고 내부적으로 시도하고 있었는데, 도입이 좀 늦어져 시기가 맞지 않았다”고 했다. 관련 피드백이 있기 전에 빠르게 준비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현재 정동극장은 자막 서비스를 시범 운행 중이다. “자막부터 작품 성격에 맞게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순차적으로 적용해 나가면서 확대해 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팀장에 따르면 정동극장은 배리어프리에 대한 지원이나 규제를 따로 받지 않는다. “예산이나 인력 등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자막 서비스에는 자막 제작비, 자막 운영 인력비, 자막기 사용비 등이 들어간다. 공동제작 작품에서는 협의도 필요하다. 그는 “공동제작인 경우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진행하도록 권유하고 있고, 되도록 하실 수 있게끔 극장에서도 지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전보다 배리어프리의 취지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청인(비청각장애인) 관객의 불만도 마주한다. “당일에 현장 로비에서 ‘공연 보는 데 눈이 너무 부셨다’고 말하고 가는 분들도 극소수지만 계신다”고 말했다. 배리어프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극장은 배리어프리가 필요한 관객 수요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적합한 방식을 찾아 나가는 게 지금 저희의 과제인 것 같다.”

▲ 리허설 중 무대 양쪽 모니터에서 한글 자막이 나오고 있다. (국립정동극장 제공)
▲ 리허설 중 무대 양쪽 모니터에서 한글 자막이 나오고 있다. (국립정동극장 제공)

배리어프리 공연과 서비스는 국공립 단체를 중심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국립극단은 작년 기자간담회에서 ‘공공성 강화’를 목표로 배리어프리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해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에서 극단 최초로 전회차에 수어 통역·음성 해설·한글 자막을 제공했다. 자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온라인 극장’에서는 연극 ‘스카팽’의 배리어프리 버전 영상을 볼 수 있다. 화면해설과 수어 통역 버전 두 가지다. 올해 개막한 ‘소극장 판-타지’에는 수어 통역과 문자 통역을 제공한다. 수어로 공연을 소개하고 예매 및 관람 방법을 안내하는 영상도 만들었다.

외국은 ‘모두를 위한 공연장’ 조성에 더 적극적이다. 영국 국립극장에는 이미 배리어프리 문화가 정착했다. 홈페이지에서 ‘접근성(access)’을 누르면 자막 제공, 스마트 자막 안경, 터치 투어 등에 대한 안내가 나온다. ‘스마트 자막 안경’은 청각장애인, ‘터치 투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다. 터치 투어를 신청하면 공연 전 무대를 만져보며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아직 배리어프리가 낯선 한국과 달리 오랜 기간 지원 방법을 고민한 결과다. 홈페이지에서 각 서비스가 제공되는 공연 목록도 확인할 수 있어 편리하다. 영국에서는 매년 330만 명의 장애인이 공연을 관람(‘접근 상황 보고서 2018’)한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공연 자체가 적다. 인터파크 티켓에서 4월 3주 기준 각각 랭킹 50위 이하 연극과 뮤지컬 100개를 살폈다. 예매처 좌석 배치도에 휠체어석이 있거나 관련 예매 안내가 적힌 극은 총 59개였다. 작품 규모가 비교적 큰 뮤지컬(45개)이 연극(14개)보다 많았다. 한글 자막이나 수어 통역, 음성 해설 등을 제공한다는 공연은 총 4개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는 영어 공연이라 한글 자막을 제공할 뿐 배리어프리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2021 공연예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석을 갖춘 공연장은 전체의 57.5%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예술지원부의 김신애 과장(33)은 “휠체어석이 없는 경우가 많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야 보장이 완전하게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대부분 휠체어용 객석이 정해져 있어 시야가 보장되는 관람석을 선택할 수도 없다. 그는 “특히 대학로 소극장 같은 경우 지하에 위치하거나 계단이 있는 경우가 많아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공연 관람을 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청각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 음성 해설 등을 제공하는 공연은 더욱 드물다. 앞서 조사한 100편의 공연 중 뮤지컬 ‘쇼맨’은 한글 자막 8회, 연극 ‘당선자 없음’은 수어 통역·음성 해설·한글 자막 3회, 연극 ‘7분(sette minuti)’은 수어 통역 지원공연 2회를 시행한다. ‘쇼맨’은 국립공연장 작품이고, ‘당선자 없음’은 두산아트센터 기획작이다. 연극 ‘7분(sette minuti)’은 ‘2022년 서울특별시 배리어프리 연극공연 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서울 소재 우수 작품 공모에서 5개 극단을 선정했다. 각 1200만원 내외의 지원금은 배리어프리 제작비로만 사용하도록 했다. 수어 통역 지원공연에서는 등장인물 수만큼인 11명의 수어 통역사가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공연에 투입할 수 있는 수어 통역사 자체도 적다. 김 과장은 “수어 통역이나 음성해설사가 공연에 투입되려면 공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충분한 번역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은 배리어프리 공연 제작을 위한 교육을 시행한다. 장애에 대한 이해가 있는 수어 통역사나 음성해설사가 공연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이다. 그는 “공연 음성 해설, 공연 수어 통역 등을 시도해볼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지원 예산은 매년 조금씩 늘고 있지만 충분치 않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은 장애인 문화예술 지원사업으로 문화예술 향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비)장애예술단체의 장애인 초청 및 장애인 대상 찾아가는 예술 활동을 지원한다. 올해는 해당 프로그램에 신청한 170개 단체 중 33곳을 선정했다. 김 과장은 “예산 확대와 더불어 장애인의 예술 접근성을 확보할 수 있는 직·간접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갈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콘텐츠가 많아져 장애인의 선택권이 넓어졌으면 좋겠다.”

▲ 영국 국립극장의 Access(접근성) 안내 (출처=National Theatre London UK 홈페이지)
▲ 영국 국립극장의 Access(접근성) 안내 (출처=National Theatre London UK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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