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최기영 기자(정치부)는 납북 귀환 어부에 대한 전화를 2021년 8월에 받았다. 발신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였다. 위원회는 1970~1980년대 서해안 백령도 일원과 강원 동해안에서 납북됐다가 귀환 후 간첩으로 몰린 어부를 조사 중이었다.

“억울한 피해를 입은 어민이 3600명에 달하는데 신고한 이는 3명에 불과해 조사가 원활치 못하다”는 상황 설명과 함께 “피해자 대다수가 거주하는 강원도의 대표 언론, 강원일보가 사건을 조명해 주면 좋겠다”고 위원회 직원이 말했다.

최 기자는 충격을 받았다. 지역에 수천 명의 피해자가 있을 정도의 사건을 전혀 몰랐다는 점에 자책감도 생겼다. 위원회는 3년 기한의 한시적 조직이어서 언론 공조 없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도움을 요청했다.

강원일보는 위원회를 취재하면서 정부의 공식기록을 검토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피해자를 만날 필요성을 절감했다.

문제는 피해자 섭외였다. 납북과 고문의 악몽을 끄집어내기가 힘들었다. 40~50년이 지나도록 명예 회복이나 배상이 전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인터뷰에 응해도 나쁜 기억만 다시 생각날 뿐 바뀌는 점은 없다고 피해자들은 우려했다.

지역사회 도움으로 피해자 4명(안정호 김창권 김춘삼 김성학)을 섭외했다. 최 기자는 “모든 취재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피해자는 처음 만난 이 네 사람”이라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을 바탕으로 기자가 나가자 독자들이 연락하기 시작했다.

취재팀이 강원 고성에서 만난 안정호 씨는 1980년 9월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가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254일 뒤에 귀환했다. 안 씨는 “스스로 월북했다”라는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고 고문을 당했다.

김창권 씨는 납북 귀환 어부 고(故) 김봉호 씨의 아들이다. 창동호의 선장이자 납북 귀환 어부였던 고인은 간첩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실형을 살았다. 그의 자녀 7명은 ‘간첩의 자식’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했다.

김춘삼 씨는 15세에 납북됐다가 1년 만에 귀환했다. 자진 월북했다는 내용의 조서 작성을 강요당하고 폭행, 고문, 감시에 시달렸다. 김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을 복역했다.

김성학 씨는 고문경찰 이근안 씨에게 고문당한 인물로 많이 알려졌다. 귀환 어부의 간첩 조작사건에서 최초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 씨는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진실규명에서 진전된 결과로 나아가는 단초가 된 인물”이라고 최 기자는 말했다.

▲ 납북귀환어부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 창립식(출처=강원일보)
▲ 납북귀환어부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 창립식(출처=강원일보)

보도 이후 ‘동해안 납북귀환어부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이 2021년 12월 10일 생겼다. 김춘삼 씨가 대표를 맡았다. 그는 “해당 보도가 수면 밑에 있던 것들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이 모임 결성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같은 단체의 엄경선 운영위원은 “지금까지 지역 신문에서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피해자 982명을 직권조사하기로 했다. 피해 당사자가 국가 기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도 국가가 직접 조사하는 절차다. 피해자는 행정기관과 사법기관에 피해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강원도의회는 ‘강원도 납북귀환어부 국가폭력피해자등의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본회의에서 2월 17일 의결했다. 예산을 확보해 피해자를 도울 계획이다.

강원민주재단 하광윤 상임이사는 ”지역 언론의 보도 이후 나타난 일련의 과정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강원일보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피해자도 취재하기로 했다. 최 기자는 “예상 이상으로 기사의 파급력이 컸다”며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 보도를 올해도 연중으로 끌고 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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