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로더(David Broder)라는 미국 기자가 있습니다. 1953년 일리노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2년 뒤에 워싱턴DC의 언론사로 옮깁니다. 뉴욕타임스에 1965년 들어갔다가 워싱턴포스트로 이듬해에 스카우트됩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실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언론계의 거물급(the heavies), 워싱턴 언론계의 학장(the dean of the Washington press corps), 기자에게 기자 같은 존재(a reporter’s reporter)로 불렸습니다.

브로더가 2011년 세상을 떠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저널리즘의 진정한 거인(a tue giant of journalism)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부부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 장관은 한 달 뒤에 추모 행사에 참석합니다.

그가 정치 기자의 전설로 남은 이유는 국민을 중심에 놓고 정치와 정치인을 취재했기 때문입니다. 정당 움직임과 정치인 발언과 여론조사가 아니라 민심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정치와 선거 흐름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시리즈 ‘혼란에 빠진 유권자(The Troubled Voter)’를 볼까요. 워싱턴포스트가 1970년 10월에 게재했습니다. 3회분 기사를 위해 브로더는 동료와 함께 10개 주를 돌며 유권자 200명을 만났습니다.

브로더는 주택가와 거리의 유권자를 기사에서 비중 있게 처리했습니다. 드라마와 영화로 비유한다면 유권자를 조연이나 단역이 아니라 주연 배우로 생각했습니다. 모교인 시카고대학교의 정치연구소 소장은 브로더를 추모하는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워싱턴에만 머물지 않았고 여론조사로만 국가를 보지 않았다. 통념에 의존해서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는 워싱턴 밖으로 갔다. 차에 앉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국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기 위해서 선술집과 작은 식당을 찾았고 유권자의 집 문을 두드렸다.”

브로더는 서울~부산의 거리에 맞먹는 400㎞ 거리를 해마다 400번 정도 오가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후보자와 유권자가 서로를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려 했습니다.

대선 기획을 작년에 시작하면서 저는 브로더의 자세와 방식을 참고하도록 스토리오브서울 기자단에게 조언했습니다. 특히 네 번째 주제(1000명, 천명‧天命을 말하다)에서는 유권자 1000명을 만나게 했습니다.

기획을 마치고 집계했더니 기자단이 시민 640명을 만났습니다. 목표에 미치지 못했지만 거리와 주택가와 상가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수없이 거절을 당하면서도 찬바람을 맞으며 민심을 들었습니다.

마지막 주제(선거 그 후)에서는 100% 실명 취재원만 허용한다고 했습니다. 기자단은 이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10회분 기사에 나오는 시민 112명이 모두 실명입니다.

기성 언론 어디에서도 이렇게 유권자를 많이 만나고, 실명으로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학생 신분의 기자단이 예의를 갖추고 노력하니까 유권자가 소중한 시간을 내서 대화에 응했습니다. 기자단이 자랑스럽고 유권자가 고마운 이유입니다.

노력하는 기자가 많을수록 언론의 수준이 높아지고, 기자의 노력을 알아주는 시민이 많을수록 한국의 정치 수준이 높아지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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