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비밀은 이미 다 밝혀졌고, 자연에 영혼 따위는 없다고 하면서 자연을 비웃는 사람들은 산 속의 봄 태풍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연이 봄을 낳을 때는 마치 산모가 이불을 쥐어뜯듯 온 산을 발기발기 찢어놓곤 한다. 자연은 살아있고 출산의 진통을 겪는다. 산에서 봄을 맞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본문中>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다섯 살 짜리 인디언 혼혈아 '작은 나무'가 부모님을 모두 잃고, 체로키족인 할아버지·할머니를 따라 산 속 오두막집 생활을 한 7년 동안의 기간을 다룬 이야기이다.
주인공 '작은 나무'는 저자 포리스터 카터의 어릴 적 이름으로, 실제 체로키 인디언 혈통을 받은 저자의 어린 시절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 속 할아버지 '웨일즈'도 실제 그의 할아버지 삶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할머니 '보니 비' 역시 실제 인물인 체로키 인디언 고조모와 저자의 어머니 모습을 합쳐서 만든 인물이다. 이렇듯 저자의 어렸을 적 체험을 바탕으로 재창조된 자전적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단순하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애정이 묻어나는 체로키족의 생활철학을 담백하게 담아낸 책이다.
숲 속에서 생활하면서 '작은 나무'는 인간뿐만 아니라 온갖 자연물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지혜를 터득한다. '작은 나무'는 대지의 여신 모노라가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만들어 내는 봄의 태풍을 보았으며, 달이 없는 밤에 뿌리면 좋은 씨앗은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러면서 '작은 나무'는 번식기인 봄과 여름 동안에는 덫을 놓지 않고, 절대로 취미 삼아 낚시나 사냥을 하지 않는 인디언의 자연 친화적인 사상을 이어받게 된다.
자극적인 조미료 없이 소담스럽게 담아내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쉽게 놓치기 쉬운 자연 현상을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의 눈앞에 보일 듯 펼쳐 놓는 데 있다. 더 나아가 자연의 이치를 인간 영역에까지 적용시키는 글귀들은 낮지만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가 죽은지 10년이 지난 1991년 전미 서점상 연합회가 설정한 제 1회 ABBY상을 수상하며 미국의 '작은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있다. 그것은 주인공인 '작은 나무'가 미국 사회에서 인디언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겪어야했던 소외와 고통, 그 과정에서 폭로된 미국 사회 권력층인 정치가와 기독교계의 위선과 잔혹성이다.
"너는 악의 씨를 받아서 태어났어. 그러니 애초에 너한테 회개 같은 게 통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너의 사악함이 다른 기독교도들을 물들일지 못하도록 가르쳐줄 수는 있지. 회개하지는 못하겠지만…울게 만들 수는 있지!" <본문 中>
인디언에게는 교육시킬 자격이 없다는 백인들의 고소로 '작은 나무'는 고아원으로 강제 수용된다. 그 곳에서 고아원의 목사는 "작은 나무는 인디언이고 사생아이니까 죄인"이라는 명분으로 두 개의 막대기가 부러질 때까지 그의 등을 짝짝 소리가 나도록 때린다. 결국 '작은 나무'의 등에서 흘러내린 피가 신발에 질척거리게 된다.
이렇듯 강한 자의 논리로 그에 반대되는 일체의 것들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질서. 이것은 이 소설 속 '작은 나무'가 미국 사회에서 인디언이란 신분으로 인해 겪었던 것처럼, 고문정치가 성행하던 한국의 1980년대를 살아온 이들에게도 겪어야 했던 현실이었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불순한 소수의 적색 분자들을 축출, 제거하여 우리 강산 푸르게~푸르게 하자는 '녹화사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사업은 국가가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국가의 '은총'으로 그들의 '사악함'이 다른 평범한 시민들을 '물들이지 못하도록' 단속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논리와 강한 자의 논리가 소수와 약한 자들을 침묵하도록 강요하는 사회. 그 오만함과 경직성의 끝은 무엇인가?
소설 속 '작은 나무'는 오두막집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만의 비밀장소에서 바람과 나무와 시냇물과 새들이 불러준 부드러운 노랫소리로 그 동안 다쳤던 영혼을 깨끗이 씻는다. 그러나 폭력과 상흔으로 얼룩진 1980년대를 살아온 영혼들은 그 상처가 이제는 치유되었는지…
이 소설이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쓰라림을 주는 것은 소설 속 '작은 나무'가 그의 따뜻했던 날들로 돌아간 것에 반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끝나지 않은 과거 속에 치유되지 않은 영혼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정순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