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북구에 석양이 지고 있다. 호랑이가 웅크린(crunching tiger) 자세라 와호산장성(臥虎山長城)으로 불린다. (출처=차이나하이킹)
▲ 고북구에 석양이 지고 있다. 호랑이가 웅크린(crunching tiger) 자세라 와호산장성(臥虎山長城)으로 불린다. (출처=차이나하이킹)

세계 최초의 기자는 누구일까. 언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페이디피데스를 꼽는다.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와의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아테네 시민에게 전달하고 숨을 거뒀다. 올림픽 마라톤 게임의 기원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에는 작개언로(作開言路)가 있다. 언로를 만들고 크게 열어서 민정을 살피겠다는 유교의 통치 철학이다. 이를 구현하는 언론 삼사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두었다. 이 삼사는 ▲ 주위 환경을 감시하고 ▲ 사회 제 세력을 연결하며 ▲ 세대 간 문화를 전승하는 근대적 언론의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의 종군기자로는 임진왜란의 실상을 <징비록>에 남긴 류성룡을 꼽을 만하다. (송복·서재진, 2019, <서애 류성룡의 리더십>) 또 최근에는 율곡 이이를 ‘조선의 언론가’로 여기는 저술이 나왔다. (임철순, 2020, <언론가 이율곡>)

그렇다면 한국 트래블 저널리즘의 최고봉은 누구일까. 단연코 연암 박지원이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 만수절 사절단에 속해 1780년 압록강을 건너 연경(지금의 베이징)을 거쳐 허베이성의 청더(承德)를 다녀왔다.

건륭제는 연경에 도착한 조선의 사절단을 황실의 여름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불렀다. 박지원은 이러한 여행기를 전 26편으로 이루어진 <열하일기>에 남겼다. (참조, 심경호, 2011,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201~202쪽)

고미숙은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열하일기>를 꼽으며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또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또한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그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뜨거운 ‘접속’의 과정이고, 침묵하고 있던 ‘말과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굴’의 현장이며, 예기치 않은 담론들이 범람하는 ‘생성의 장’이다.” (박지원 지음, 고미숙 외 옮김, 2020, 개정신판, 5쪽)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러한 평가가 “과장됐다”고 말한다. 박지원이 산문가였기에 “한시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한시는 음률의 조화와 스토리텔링에서 중국 학자들도 감탄할 정도라 한다.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은 장장 6개월 동안 광활한 중국의 동북부와 황허 지류가 흐르는 중원을 바라봤다. 트래블 저널리스트뿐만 아니라 기자나 PD 지망생이라면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일독을 권한다.

▲ 열하일기 여정도(일러스트 ⓒ 조형석)
▲ 열하일기 여정도(일러스트 ⓒ 조형석)

연암이 속한 사절단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사행로(使行路)의 시작점인 구련성(九連城, 지금은 진강성으로 불림)에 들어간 후, 책문(柵門), 요양(遼陽), 성경(盛京)을 통과해 산해관(山海關)과 통주(通州)를 거쳐 황성이 있는 북경에 이르렀다.

이 길이 청과의 조공로(朝貢路)이다.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밀운을 거쳐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Gubeikou, Ancient North Pass)로 빠져나와 청더까지 나흘 밤낮을 자지 않고 달렸다.

청더는 당시 열하(熱河)로도 불렸다. 지하 온천이 곳곳에 있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기 때문이란다. 이 산장의 넓이는 5.46㎢로 서태후가 여름 피서지로 사용했던 베이징 시내의 이화원의 2배 이상 규모다.

열하일기 26편 중에서 만리장성을 통과하면서 쓴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가 명문장으로 꼽힌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연경에서 열하로 갈 제, 창평(昌平)으로 길을 잡으면 서북쪽으로 해서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고, 밀운(密雲)으로 길을 잡으면 동북쪽으로 해서 고북구로 나온다. 고북구로부터 장성을 따라 동쪽으로 산해관까지가 700리, 서쪽으로 거용관까지가 280리다.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위치한 장성가운데 험하기로는 고북구만 한 요새가 없다.”

고북구에서 거용관(居庸關‧Juyongguan Pass)까지가 280리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1리를 500m로 계산하니 140㎞가 나온다. 구글 맵으로 이 거리를 측정하니 153㎞이다. 또 고북구에서 산해관까지가 700리라고 했으니 350㎞이다. 구글 맵으로는 316㎞가 나온다.

당시의 거리 계산이 지금과 얼추 맞다. 지난 편의 ‘만리장성과 역사 왜곡’에서 언급했듯이,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인 산해관에서 서쪽 끝 가욕관까지 거리가 통상적으로 3460㎞로 기록된다. 우리 식으로 계산해도 1만 리가 나오지 않는다. 구글 지도로는 2238㎞이다.

박지원은 고북구의 위치를 소개한 후 그곳을 지나는 감회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내 한낱 서생일 뿐이로구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야 비로소 성 밖을 나가게 되나니.……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버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 놓은 칼날 같았다. 마침내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트래블 저널리스트로서 감동적인 장면을 보게 된다면 “왜 이제 이곳에 왔나, 조금이라도 일찍 왔다면 좋지 않았나”라고 자문하기 마련이다. 박지원도 고북구를 통과하면서 서생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44세에 이르러서야 바깥세상을 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구상 어디를 여행하더라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을 보기 마련이다. 날씨가 좋다면 음력에 따라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을 볼 수 있다.

영국에서 아일랜드 바다로 나아가는 페리 위에서나, 로마 석양의 콜로세움이나, 에디오피아 아셀라의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나, 칠레 최남단 파타고니아의 새벽하늘에서도 이태원 옥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같은 달이 떠 있다. 보름달이 환히 비출 때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운 눈길처럼 느껴진다.

▲ 고북구~금산령~사마대 장성 트랙. 사마대 장성이 멀리 보인다. (출처=차이나하이킹)
▲ 고북구~금산령~사마대 장성 트랙. 사마대 장성이 멀리 보인다. (출처=차이나하이킹)

연암이 지났던 고북구는 천연의 요새로 험준하다. 중국 진나라 시절부터 시작해 이곳에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박지원은 그때의 감회를 여행기에 남겼다. 

“지금 깊은 밤에 나 홀로 만리장성 아래에 서 있자니, 달은 떨어지고 강물은 울며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은 허공을 날아다닌다. 마주치는 모든 경계마다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기 짝이 없다. 홀연히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고 특이한 흥취가 왕성하게 일어나 공산(公山)의 초병(草兵)이나 북평(北平)의 호석(虎石)이라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고미숙, 2012,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179~180쪽)

여기서 공산의 초병은 팔공산에 서 있는 풀까지도 군사로 보였다는 부견의 고사이며 북평의 호석은 한나라 이광이 우북평의 바위를 범으로 보고 활을 쏘았다는 고사이다. 장성 아래에 홀로 서 있다면 이런 고사에서 보듯이 두려움에 ‘머리털이 쭈뼛하고 심장이 쿵쿵 뛰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암은 장대한 만리장성에 압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의 화려한 권위 뒤에 숨겨진 두려움과 나약함, 혹은 역사의 무상함”이 엄습했다고 적고 있다.

20세기 초에 <연암집>을 펴낸 창강 김태영은 이 ‘원혼들에 대한 비가(悲歌)’로 적은 박지원의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를 <삼국사기> ‘온달전’과 더불어 한반도 오천 년래 최고의 문장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참고, 고미숙, 177쪽).

고북구는 유구한 세월을 통해 수많은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장이다. 이곳에서 금산령(金山岭‧Jinsanling)을 거쳐 사마대(司馬臺‧Simatai) 장성까지가 20㎞다. 베이징을 방문할 때 2박 3일 시간을 내어 하이킹할 만하다.

과연 박지원이 느꼈던 감흥이 일어날까. 연암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를 읽으면 중앙 정계에 출사한 적은 없으나 중원을 누볐던 북학파 선각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오늘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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