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여유와 차분함이 느껴지는 공기 맑은 곳에 한 호텔이 서 있다. 힐튼호텔이다. 지난 31일, 그곳은 정부 관료와 외국인, 취재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저명한 경제학자와 미래학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정책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모였다. 회의 주제는 여러 가지였지만, 결국은 하나로 설명 가능하다. 신자유주의에 바탕한 세계화 시대에 아시아,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이 어떻게 더 잘 살 것인가 하는 문제다. 참석자 대다수는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날 김대중 대통령은 개막 연설을 했다. 그리고 소외된 계층을 위해 생산적 복지 개념을 역내 국가간에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말하는 생산적 복지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복지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예산의 20% 정도를 무노동자를 위해 쓰는 것과 달리, 일자리를 제공해서 무노동자를 생산의 길로 끌어들이자는 말이다. 시장에서의 참여활동을 전제로 한 복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와 복지는 어울리는 한 쌍인가?

97년 국내에 처음 소개돼 이제는 세계화에 대한 고전이 된 책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의 저자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오늘날 시장에서의 생산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따른다는 말과 같다. 다른 군말을 다 뺀다면, 신자유주의란 국가의 개입 없는 시장에 대한 굳은 믿음이다. 실제로 이미 세계 자본은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을 초월한 무한 경쟁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복지 국가인 서유럽 나라들조차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실정이다. 전통적으로도 자유주의와 대립관계에 있던 복지이념(혹은 민주주의)은 신자유주의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생산적 복지 개념은 자유주의와 복지 사이의 모순을 간과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 책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빠르게 20대 80의 사회로 양분되어가고 있다. 20%의 사람들에게 세계의 부가 집중되고 있다. 반면 나머지 80%는 점점 빈곤해진다. 그 80%의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부자들에게 복지비용을 강요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보면, 국가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나머지 80%는 국가의 복지가 아니라 그들이 제공하는 오락물과 먹거리에 의존하는 티테인먼트(titainment) 사회가 올 것이라는 이들의 우려 섞인 예측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한다. '20대 80의 사회'로 가는 추세를 멈추게 할 계획과 전략은 오히려 이미 마련되었다고 강조한다. 이들에 따르면, 구호 뿐인 생산적 복지 보다는 공공 재정을 통한 새로운 세수 원천을 개발해야 한다. 사치세와 자연자원 소비세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한다. 외환 거래와 금융에 징수하는 토빈세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사회 불평등이 세계의 불안정으로 귀결된 미래에는 이미 늦다. 그 시점에서 21세기 초를 생각하며, "그때까지만 해도 가능성이 있었어"라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지금부터라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는 경제논리에 의해 모든 가치들이 결정되는 사회가 아니며, 국가가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할 때 가능하다"는 말에 귀 기울이자. "미래 행복의 열쇠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과 자손을 위해 지식과 자원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제임스 울펜손(세계은행 총재)의 서울포럼 기조연설은 틀린 말이 아니다.

김수진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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