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상혁 기자
- 승인 2017.03.28 19:36
본 코너는 후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지도자를 만든 요인이 젊은 시절에 있지 않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취재팀은 1월 중순부터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서전, 언론보도, 블로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용했지만 이런 내용만으로 기사를 쓰기가 곤란해 2월부터 직접 취재에 나섰습니다. 출마선언식, 토론회, 출판기념회…. 주변 인물도 만났습니다. 배우자, 학교친구, 회사동기, 투쟁동지, 보좌관, 정책자문단을 통해 후보의 면모를 더 파악했습니다. 유명 언론사의 정식기자가 아닌, 학생기자를 위해 많은 분이 시간을 내서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에 응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당의 후보선출이 막바지로 향하는 중입니다. 경선결과 못지않게 정치 지도자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주요 후보를 모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15년 전 제가 보수당에 입당한 것은 제가 꿈꾸는 보수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꾸는 보수는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흘려 노력하는 보수입니다.” (2015년 4월 8일 교섭단체 대표연설)
“따뜻한 공동체, 정의로운 세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이것은 제가 정치를 해온 이유이고 제가 추구해 온 민주공화국의 헌법 가치입니다.” (2017년 1월 26일, 대선출마 선언)
두 연설문은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이 생각하는 보수, 바람직한 보수의 모습을 알려준다. 유권자들은 궁금해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정말 따뜻하고, 정의롭고, 책임 있는 보수가 가능할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취재에 나섰다. 지난날에서 따뜻함, 정의로움, 책임감을 볼 수 있다면 그의 말을 어느 정도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따뜻함
“1992년이었다.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회사를 나갈 수 있는 지경까지 갔었다. 고민 끝에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유승민 연구원 방에 찾아갔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가 한 마디 하더라. 도와줄게. 그 때를 잊지 못한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의 말이다.
공 소장은 당시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일했다. 유 의원은 정부 산하기관의 입장에서, 공 소장은 기업의 입장에서 재벌문제를 봤다. 같은 대상을 다른 관점에서 고민하다가 팀 프로젝트나 토론회에서 자주 만나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같은 회사도 아니고···. 솔직히 귀찮은 일로 느껴질 법했지만 자기 일처럼 챙겨서 도와줬다. 그래서 배신의 정치로 일부 사람들이 비난할 때 나라도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말해줘야 했다.” 유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날 때 공 소장은 “유승민 의원은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남겼다.
공 소장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경영연구소를 운영한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 교육센터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공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간 유승민에 대한 확신이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공 소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유승민은 의리의 남자다. 옛날 말에 좋은 친구 한 명 가져도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유승민 의원을 보면서 떠올리는 말이다.”
유 의원의 따뜻함을 보여주는 일화는 고교시절로 올라간다. 대구 경북고 3학년 때 유 의원이 가출한 적이 있다. 친구가 담임에게 얻어맞고 경남 합천의 해인사로 떠났다. 이 친구를 찾으려고 유 의원도 집을 나왔다.
기자는 2월 1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640아트타워에서 열린 ‘You&me 유승민 소통콘서트’에 참석했다. 유 의원과 ‘유심초’라는 팬카페 회원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 장년층, 부모 손을 잡고 온 어린 아이, 젊은 커플이 보였다. 행사가 3시간 동안 진행됐는데 중간에 자리를 뜨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이날 유 의원은 ‘따뜻한 보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KDI 연구원 때는 자유시장과 경쟁만 좋아했다. 2005년 대구 동구 을에 당선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지역구 근처에 군 공항이 있는데. 3층짜리 빌라가 시내 다른 빌라보다 훨씬 싸다. 시끄럽고 환경이 좋지 않아서다. 그래서 시내에서 사업하다가 실패하신 분들이 많이 와서 산다. 반야월 시장도 자주 찾아가는데 여기도 정말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 많다. 지역구 국회의원을 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사정을 많이 알게 됐다. 저는 이 경험이 많은 가르침을 줬다고 여긴다. 그래서 복지, 노동, 빈곤, 비정규직, 교육 문제는 보수가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로움
유 의원은 2015년 7월 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물러나면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렇게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기자가 참석한 소통콘서트에서 유심초 회원들은 유 의원의 소신을 보여주는 20대 시절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고 계시나”며 유 의원이 놀랄 정도의 일화가 이어졌다. 다음은 그 중 하나.
유 의원은 1979년 육군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복무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해다. 당시 사령관은 노태우 전 대통령. 어느 날, 유승민 등 3명을 사령관 비서가 호출했다. 사령관 자녀의 과외를 시켜달라고 했다. 유 의원은 도저히 하기 싫어서 못한다고 했다.
KDI 시절에도 그는 ‘아닌 건 아니다’고 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998년 11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다. 클린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마치고 경복궁 안의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시민대표 6명과 원탁간담회를 가졌다. 유승민 KDI 수석연구원이 장하성 고려대 교수, 박용오 두산그룹회장과 함께 초청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내건 조건이 너무 많고 우리 현실과 안 맞는 면이 많다, 그게 다 옳은 게 아니다, 위기 극복은 좋은데 너무 간섭하지 마라…. 유 의원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혀있던 상태에서 이런 내용이 보도되자 더 어려워졌다. 연봉이 깎이고, 논문발표도 못하고, 신문사 기고조차 힘들었다. 13년간 다닌 KDI를 그만두고 한나라당으로 가게 됐다. 월급 한 푼 없는 여의도연구소장이 됐다.
소통콘서트의 사회자는 소신을 밀어 붙이는 힘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물었다. 유 의원은 아버지(유수호 전 의원)의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정치를 한다고 했다. “저희 부친은 늘 의협심을 가져라, 절대 비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저보다 힘센 사람, 윗사람이 부당한 행동을 하면 제가 조금 대들고 그런 성격이었다.” 유 의원의 부친은 박정희 정권 반대시위를 주도한 운동권 학생을 석방시킨 게 빌미가 돼 1973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라고 했을 때를 거론하자 그는 “물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는 절대 변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도와드렸던 그분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라는 말을 들으니까. (정적) 대통령의 잘못을 지적하는 걸 배신이라고 하면 나는 그런 배신은 언제든지 하겠다”고 답했다. 지지자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책임
소신이 지지율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관훈클럽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이 나왔다. 2월 27일 서울 중구의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 그가 도착하자 플래시가 계속 터졌다. 언론인 패널들은 반등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지율에 대해 언급했다. 같은 질문이 소통콘서트에서도 나왔다.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50대 남성 유권자는 유 의원의 부드러운 이미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늘 내가 와서 보니까, 너무 부드러워 보인다 아닌교. 내가 너무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유승민은 두 곳에서 모두 같은 말로 대답했다. “탄핵 결정이 나면 그때부터 대선 판국이 새롭게 짜여질 거다. 범보수는 단일화해야 되고, 단일화하면 내가 될 거다. 결국 마지막에는 보수 대 진보의 대결 구도로 가면 승부는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보수의 적자”라는 말을 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17년 간 국회의원을 했고, 한 번도 보수당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면서. 그는 정말 보수의 적자일까. 많은 보수층이 아직 그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정체성 때문이다. 보수논객인 전원책 변호사가 “정의당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할 정도다. 유 의원은 소통콘서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법치’라 표현했다. 그러면서 20대 시절부터 늘 갖고 다닌다는 소책자 형태의 헌법을 보이며 설명했다.
“보수는 자유와 성장만 보고, 진보는 복지와 평등만 본다. 그렇게 보니까 진보 보수가 나뉘어서 자꾸 싸우는 거다. 보수 진보 모두 외눈박이다. 헌법 안에는 성장, 복지, 자유, 평등이 어우러진다. 이 모두를 합쳐 정의와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우리 국민들, 정치인들이 헌법을 잘 읽어보고 상대방의 생각을 너무 폄하하지 말고 생각의 차이를 극복했으면 좋겠다. 공통분모가 많아지는 사회로 가야 한다.”
소통콘서트가 열린 2월 14일은 그가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여의도 연구소장에 취임한 날이었다. 공식 행사가 끝난 뒤, 그는 팬들의 성화에 힘입어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집 떠나 열차타고’ 라는 노랫말이 유 의원의 상황을 암시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