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1호선 용산역 1번 출구 밖에는 고층건물이 많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려 10분가량 걸으면 풍경이 달라진다. 건물이 낮아지고 역 주변과 달리 밝은 조명을 보기 힘들다.낮아진 건물 끝에 기찻길이 있다. 경의중앙선과 경춘선 화물열차가 통과하는 용산구 한강로동 백빈 건널목이다. 열차가 지날 때마다 종이 울려 땡땡거리로 불린다. 기찻길을 건너기 전에 불이 켜진 가게가 보였다. 35년째 같은 자리를 지킨 용산방앗간이다.주인 박장운 씨(62)의 하루는 새벽 4시 전후에 시작된다. 가게 앞의 먼지를 쓸어내고 화이트보드에 적힌 예약주문
쌀가루를 빻아내는 기계 소리, 고소한 콩 냄새, 팥을 찌는 따뜻한 연기. 이제는 기억 한 편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방앗간을 인터넷에서 찾았다.서울 종로구 명륜길의 낙원떡방앗간. 오래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콩 냄새가 반겼다. 가게 안쪽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주인 박병수 씨가 낮잠을 잤다. 가게를 나와 전화를 해서 깨우고 다시 찾았다.가장 바쁜 시간은 새벽이다. 일찍 일어나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 씨는 “아우. 아침에 일어나는 게 쉬운 게 어디 있어. 남 놀 때 일해야 하고, 명절 때도 일해
인터뷰를 위해 서울 시내 현상소 몇 곳에 연락을 남겼다. 발품을 팔며 취지를 전했지만 거절당했다.어느 날, 현상소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영업이 끝난 뒤의 잔업시간에 인터뷰를 해도 괜찮겠냐는 내용이었다. 기자가 당장 내일도 가능하냐고 묻자 답문이 왔다. “네. 내일 오세요.”기자는 11월 27일 저녁 8시, 서울 중구의 골목길에 들어섰다. 인쇄소가 많은 곳이었다. 세련된 호텔 맞은편으로 오래된 건물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 3층에서 회색철문 앞에 섰다.전화를 걸자 낡은 문이 열렸다. 예상보다 젊은 주인이 들어오라고 했다. 현대적
언제부턴가 우리 주위는 손수 만든 수공예 제품이 아니라 공장에서 균일하게 찍어낸 기성품으로 가득 찼다. 한지를 붙여 만든 함 대신 그냥 플라스틱 케이스가, 하나하나 수놓은 나전칠기 장롱 대신 서양식 가구가 늘었다.경북대 3학년 강유진 씨(20)는 수공예 제품이 있느냐는 물음에 없다고 말했다. 배워본 적도, 접한 적도 거의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을 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성균관대 2학년 이지수 씨(20)는 관심도 딱히 없다고 말했다. 수공예에 대한 관심은 이렇듯 매우 적다. 수공예 전통을 지키는 장인은 이런 변화를 어
빽다방 청년다방 콩다방 사라다방…. 다방 이름을 빌린 카페가 늘어나는 중이다. ‘진짜 다방’은 어디로 갔을까.서울 중구 을지로3가에 ‘응접실 다방’이 있다. 4인석 테이블 5개가 붙어있다. 들어가서 냉커피를 주문하자 사장 홍경례 씨는 “프림 넣어 드려?”라고 물었다. 홍 씨는 혼자 일한다. 프림을 넣어달라고 하자 냉장고에서 ‘프리마’라고 적힌 봉투를 꺼냈다.‘금성 싱싱 냉장고’라는 글씨에 눈길을 주자 홍 씨는 “그게 씽씽 냉장고야. 아직도 얼음이 꽝꽝 얼어. 50년은 더 된 건데 말짱해”라고 말했다. 금성냉장고와 프리마
영화 ‘킹스맨’에 헌츠맨 양복점이 나온다. 영국 런던의 관광명소가 됐다. 이곳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화려해서만은 아니다. 주인공 몸에 완벽하게 맞으면서도 최첨단 기술을 갖춰서다. ‘나만을 위한’ 양복은 언제나 빛을 발한다. 서울에 이런 곳은 없는지 궁금했다.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좁은 골목.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100% 수제 맞춤정장 양복점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골목에서 길을 헤매자 어느 가게 주인이 말을 걸었다. 양복점을 찾는다고 하자 매장이 사라졌다고 했다.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3번 출구에 있는 ‘사비로 양복점’으로 발길
국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가정연료는 도시가스다. 전국 보급률이 80%를 넘는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1980년 후반까지 가장 대표적인 연료는 연탄이었다.한국광해관리공단에 따르면 1980년대 연탄공장은 279개였다. 2018년에는 44개로 크게 줄었고, 그나마 41개만 가동된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연탄 가게’를 검색하면 연탄을 파는 가게보다 연탄구이 가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대학생 김준석 씨(25)는 “연탄이요? 연탄 불고기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데요. 요즘 연탄 쓰는 곳은 그런 곳밖에 본적 없어요”라고 말했다. 김효경 씨(23
경기 수원의 영동시장. 걷다보면 ‘28청춘’이라 쓰인 간판과 함께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온다. 청년이 운영하는 푸드코트, 공방, 카페가 모인 청년몰이다.2층은 1층과 다르게 한산했다. 화려한 벽화와 깔끔한 인테리어로 꾸민 공간에서 공방과 카페만 영업 중이다. 푸드코트 7개 매장 중 3곳이 ‘신규매장 준비 중’이란 현수막으로 덮여졌고 2곳은 폐업상태였다.저녁시간이었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다. 어느 가족은 손님이 보이지 않자 돌아 나갔다. 또 다른 중년부부는 “이런 날 장사가 돼야 하는데 사람이 없네” “여기 망했잖아”라고 말했다.청
서울 경동시장은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시민으로 붐볐다. 점포 곳곳에 제로페이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시장 안쪽의 ‘돼지상회’도 마찬가지. 하지만 기자가 지켜본 1시간 동안 제로페이를 사용하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돼지상회’를 찾은 소진복 씨(73)는 호박과 가지를 구입하면서 현금을 냈다. 제로페이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제로페이 같은 건 모른다. 시장에서는 현금만 받는다”고 말했다. 옆에서 고구마를 사던 중년 여성도 현금으로 계산하면서 제로페이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일부 소비자는 제로페이를 알지만 실제로 이용하지는
서울 종로구의 통인시장은 일회용기에 떡볶이와 닭강정을 담아 돌아다니는 방문객으로 붐볐다. 과일과 생선을 쌓아놓고 파는 일반 시장과 달리 이곳에서는 작게 포장된 물품이 유난히 많았다. 방문객은 현금이 아니라 ‘구멍 뚫린 동전’을 내고 분식과 과일을 샀다.통인시장은 2012년 ‘엽전도시락’ 제도를 도입했다. 방문객은 5000원 상당의 엽전 10개를 구매하고 음식과 교환하면 된다.엽전이라는 전통적 소재에 힘입어 젊은 방문객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효과를 거뒀다. 통인시장에 ‘제2의 전성기’를 부른 ‘통인시장커뮤니티주식회사’는 공
서울 성동구 용답동 제2주차장에 태양광 전기차 충전소 ‘솔라스테이션’이 있다. 가로 1m, 세로 2m의 태양광 패널 23장을 가로 두 줄로 배열했다.규모는 가로 23m에 세로 4m이며, 지상에서 4m 높이에 설치했다. 태양의 고도차에 따른 발전효율을 고려해 위쪽 패널 23장은 각도가 1도씩 높아지고, 아래쪽 패널 23장은 각도가 1도씩 낮아지도록 설계됐다.패널 옆에는 에너지 저장장치(Energy Storage System)가 있다. 패널이 생산한 전기를 언제든지 꺼내 쓰도록 보관하는 일종의 전기 배터리다. 밑에는 완속 충전기(7kW
낡은 간판이 보였다. ‘만화’라고 쓰여 있었다. 건물입구로 들어서자 손가락 크기의 거미가 눈에 띄었다. 천장은 회색빛 거미줄로 가득했다. 거미에서 눈을 떼니 ‘창전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경기 이천시 창전동의 만화방. 1989년부터 30년째 이 자리를 지킨다.지하로 내려가니 벽면을 둘러싼 책장이 보였다. 만화책이 빼곡했다. 그런데도 공간이 모자란 듯, 소파 위에 만화책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는 이근호 씨(65)를 만났다.이 씨는 22평짜리 만화방을 50평 정도 되는 이곳으로 30년 전에 옮겼다. 손님이 많아 더
타다(TADA)는 소비자가 앱으로 자동차를 빌리고 운전기사까지 함께 이용하는 플랫폼이다. 작년 출시 이후 1000대 이상이 운행되는 중이다.이용자가 계속 늘어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면 기사 모집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1종 보통면허만 있으면 타다 기사가 될 수 있다.4명의 기사를 만났다. 솔직히 이야기를 하는 대신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처리했다.기자는 6월 18일, 19일, 22일에 타다를 네 번 이용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서 동작구 신대방동까지, 마포구 마포동에서 양천구 목동까지, 마포구 동교동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7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사직이용원에 도착한다. 입구를 가리던 커튼을 열고 들어서자 70대 이발사 오광덕 씨가 반갑게 인사했다.사직이용원은 5개월 전, 유명 유튜버의 ‘동네 이발소 체험기’ 영상에 등장하면서 발길이 늘었다. 그는 “오늘 오전에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왔다가 갔다”며 웃었다.이용원 벽에는 고객이 남긴 메시지가 많았다. 의자 3개, 세면대 하나. 좁은 공간이지만 고객층이 다양하다. 지방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찾기도 한다. 오 씨는 부산이나 광주에서 올라온 고객의 메시지를 보여줬다. 김영종
톡. 깨알 크기의 자그마한 조각이 떨어진다. 길이와 두께가 가지각색인 도구가 보인다. 멈춘 심장을 살리기 위한 손놀림이다. 터럭 정도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100개가 넘는 부품을 만지며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 있다. 39년 경력의 시계 기술자 최광렬 씨(59). 그를 만나려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 초이스명품시계를 찾았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시계수리 기능사 자격증을 2005년 폐지했다. 휴대폰이 시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국내 시계 제조업체는 2002년 414개에서 2009년 208개로 줄었다.최 씨는
헌 책이 모든 책장에 빼곡했다. 세 벽으로 모자라 가게 앞까지 가득했다. 1평 남짓한 내부는 책으로 이루어진 우주 같았다. 이런 작은 가게가 청계천을 따라 이어진다. 서울 중구 동대문평화시장 1층의 헌책방거리 풍경이다.거리 초입의 대원서점은 아동서적과 시리즈물을 주로 다룬다. 15년 전쯤 유행한 ‘무서운 게 딱 좋아’ 시리즈가 이제는 헌책이 됐다. 손대원 씨는 40년 넘게 운영하면서 자녀를 키웠다.하지만 최근 들어 매출이 확연히 줄었다. 독자가 전자책과 스마트폰에 더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방문객의 대다수가 초등학생 이하의 어린
서울 도봉구 창동의 아파트 단지. 얼핏 보면 다른 곳과 차이가 없다. 창틀, 에어컨 실외기, 거치대. 그런데 낯선 형체가 보인다. 창틀 아래 비스듬한, 얇고 검은 직사각형 패널이다. 36세대 중 11가구에 설치됐다.아파트 베란다의 미니 태양광 발전기다. 정식명칭은 가정용 태양광 미니 발전소. 서울시가 ‘원전 하나 줄이기 사업’으로 보급했다. 에너지 자립율을 높이고 친환경 에너지를 확대하자는 취지.설치가구는 2015년 4만에서 2018년 17만으로 늘었다. 서울시 전체 가구(360만 가구)에서 5%에 근접한 수준. 2018년에만 6만
서울지하철 1호선 회기역 1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걸어가 동광대장간에 도착했다. 동대문구 전농 1동. 입구에 쌓인 공구를 보는데 대장간 관리책임자인 이일웅 씨가 나왔다.대장간 안은 밖보다 더 추웠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재료와 공구가 가득했다. 그는 의자에 신문지를 깔아주며 앉을 곳을 마련했다. 난로 옆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름이 작업하기에 가장 힘든 계절이지만 겨울에는 쇠가 얼어서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요즘 고객은 작은 크기의 제품을 많이 원한다. 가볍고 사용하기 편해서다. 칼이나
처음에는 그저 오래된 동네 문방구를 찾고 싶었다. 밝은 조명에 깔끔한 매장, 교육받은 점원이 있는 프랜차이즈 문구점은 많다. 그러나 문 앞 오락기계에 옹기종기 모여 게임하는 아이들을 주인이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김지영 씨(52)는 1986년 서울 혜화여고를 졸업했다. 학교 앞 ‘까치문방구’ 아저씨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지예 씨(20)는 초등학생 시절에 꿈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 문방구에 가서 불량식품(?)을 종류별로 다 먹어보겠다고 했다. 그 많던 문방구는 어디로 갔을까.인터넷에서 오래된 문방구를 검색했더니 서울
서울역 15번 출구에서 10분 남짓 걷다보면 작은 간판이 보인다. 건물 안은 햇빛이 차단돼 어두컴컴하고 습기가 가득하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인기척이 느껴진다. ‘미미현상소’의 오세찬 씨(56).공간은 5평정도. 빛바랜 흑백사진이 가득하다. 사진 속 인물의 대부분은 자기 얼굴이 이곳을 채우고 있음을 잊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추억은 여전히 미미현상소에 남았다.1998년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차단속원 다림은 촬영한 자동차 번호를 확인하려고 동네 필름현상소를 자주 찾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