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5. 린 : 토마스와 함께 먹구름이 운동장을 서서히 집어삼킨다. 소나기라도 뿌릴 모양이다. 어느새 학교 곳곳에 노란 불이 들어와 부엉이 눈처럼 말똥거린다. 종이 울린 지 오래지만, 나는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다. 이대로 계속 화단에 앉아 B1A4 노래나 듣고 싶은걸. 나도 알거든? 어차피 갈 거야. 마음이 더 약해지기 전에 일어서며, 운동화에 눌린 껌처럼 찍찍 들러붙는 미련을 떼듯 엉덩이를 턴다. 나는 수업 중인 다른 반을 피해 창 그림자처럼 몰래 교실로 숨어든다. 담임에게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몰라도, 이번 시간은 자습이다
첫째날 4. 운 : 비밀의 무덤 맹물보다도 싱겁다! 날치기에 대한 짧은 소감. 훔친 가방을 내 방에 들여놓는 지금, 무지하게 나쁜 짓을 했다거나 뒤가 구려 벌벌댈 잘못을 했다는 죄책감 따위는 코딱지만큼도 안 든다. 돌아와서 반갑다 인마, 언제나처럼 쿨한 기운. 창문에 기대서 노란 장판 위에 오도카니 놓인 가방을 노려본다. 그래 봤자 고작 물건일 뿐인 게, 팔짱을 끼고 싸움이라도 걸어오는 기분이다, 쳇. 처음에 가방은 거리에서 헌팅이라도 당한 여자처럼 도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따위 허접한 가구와 싸구려 이불은 뭐냐는 식으로
첫째날 3. 오해 30분 전, 오이도행 지하철 운은 지금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바짝 달라붙은 캐러멜처럼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긴 생머리에 볼우물이 귀엽게 팬 청순한 여자애… 옆에 놓인 분홍 여행 가방이다. 동화 같은 그림이 잔뜩 그려진 명품 가방은, 여동생 린이 오래전부터 체코의 프라하와 함께 매일 노래를 부르는 바로 그 가방이었다. 머릿속으론 언제라도 그릴 수 있지만 현실에선 꿈도 꿀 수 없는 그곳, 그것. 가방의 가격을 처음 들었을 때, 운은 시원스레 마시던 우유를 린의 얼굴에 내뿜고 말았다. 도대체
첫째날 2. 운 : 훔치다 20분 전, 청계천 도망쳐! 잡히면 끝장이야! 문득 궁금하다. 부모님이 아신다면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도리질하며 나를 감쌀지, 아니면 자수해서 밝은 빛을 찾자며 경찰서로 데려갈지. 하늘에 대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니, 심하게 체했을 때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내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이 저지른 일은 아니다. 충분히 고민했고, 안 잡힐 자신도 있다. 그래 봤자 사람을 해친 것도 아니고 고작 가방 하나 훔쳤을 뿐이잖아? 후아,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미치겠다! 온몸에 돋은 털이란 털
첫째날 1. 하수 : 가출 가출은 역시, 가을에 해야 제맛이다. 여름엔 땀이 나고, 겨울엔 자칫하면 얼어 죽고, 봄에는 온몸이 나른해서 그럴 기분이 영 안 나니까. 그와 달리 가을의 상쾌함은 길을 나서기 쉽게 만들어 준다. 깊어서 멀어 보이는 하늘과 나풀대는 가로수 잎사귀가 사람의 마음을 총총거리게 만든다고나 할까? 창가를 서성이다 작은 가방을 꾸려 산책이라도 가듯이 가볍게 집을 나서기에 좋다. 지금 이렇게 정신이 반쯤 없는 상태에서도, 가을에 나오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니까. 청계천에서 바라보는 가을 풍경은 뭐 하나 더하거
약자들이 좀 더 살기 좋은 사회, 꿈꾸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제 글이 오늘 또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힘과 작은 위로를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출을 꿈꾼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절망이 넘치고, 변화의 가능성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지긋지긋해 넌더리가 날 때. 몸의 성장과 정신적인 변화가 마구 뒤엉키는, 사춘기의 방황은 그래서 더 자연스럽다. ‘세상에 나 혼자’라는 외로움으로 눈앞이 캄캄하기만 할 때, 기댈 수